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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 15 / 박경리 / 마로니에북스

無不爲自然 2020. 11. 6. 15:00

* 동경 와서 공부할 무렵, 혼자 밥을 먹고 있노라면 괜히 코허리가 시큰해지며 뼈에 사무치는 것 같은 외로움을 느끼곤 했었다. 강한 성격에 좀처럼 그런 감정에 빠지는 일이 없었는데 혼자서 밥을 먹고 있으면 겨울 벌판을 걷듯 외로워지는 것이었다. 그 후 형무소에 있을 때 인실은 음식을 대하면 외로운 것과는 사뭇 다른, 먹는 행위 자체가 비천하기 그지없이 느껴졌던 것이다. 하수구를 들락거리며 밥풀을 주워먹는 한 마리 쥐 같았고 자신이 쓰레기가 되어간다는 기분이었다. 고문을 당하고 왜경한테 심한 욕설을 들었을 때도 인실은 자신이 비천하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동경에 와서 거처를 정하고 .......... 비천하다든가 외롭다든가, 그것이 모두 감정의 사치라는 것을 인실은 깨달았다. 밥을 먹는다든가 몇 끼를 굶는다든가, 그런 일들은 그냥 무의식으로 흘러가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무의식, 그것에는 얼마간의 자학도 있었으리라. p96

 

 토지는 대하소설인 만큼 많은 인물이 등장한다. 그 많은 등장인물 면면을 살펴보면 단 한 사람도 행복해 보이지 않는 이유는 뭘까? 줄거리를 서희와 길상의 사랑이야기라고 요약할 수도 없겠지만, 사랑을 이룬 서희와 길상도 행복한 나날은 나오지 않는다. 하물며 사랑을 이루지 못한 봉순과 상현을 말해 무엇하겠는가? [김약국의 딸들]도 그렇지만 작가가 비극을 좋아해서 그런거 아닌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