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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촌수필 - 이문구

無不爲自然 2013. 12. 14. 23:40

 관촌수필은 이문구가 고향 충남 보령 대천의 관촌부락에서 자라고 겪었던 일들을 수필형식으로 쓴 소설이다. 토정 이지함의 후손으로 유복하게 자랐던 어린시절의 할아버지를 회상하기도 하고,부엌데기 옹점이와의 추억을 더듬기도하고.. 그런 이야기들이다. 평범할 것 같은 작가는 한국전쟁으로 남로당 활동을 한 아버지를 비롯하여 가족을 잃는 참사를 겪고 고향을 떠난다. 

 소설이라고 하기엔 개연성을 넘어 사실적이고 신변잡기적인 이야기들인지라 수필같기도 하고 그래서 제목이 관촌수필이다. 감성이 풍부하다 못해 넘쳐 흐르는 글을 쓰는 작가들을 사진으로나마 마주하게 되면 '생긴거 답지 않다'는 느낌이 든다. 한마디로 성깔머리 고약하게 생겼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마르셀 프루스트가 어린 시절 즐겨 읽었던 작가를 실제 만나 외모를 보고 실망했다는

 하지만 그의 글은 '우리것 이구나'하는 느낌이 든다. 절대 외국어로는 번역할 수도 없고 설사 그리 된다고 해도 우리가 느낄 수 있는 정감을 제대로 표현할 수 없는 '우리것이다'라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김유정'식의 향토성 짙은 사투리와 농촌 배경의 토속적인 삶은 호환, 마마가 두려웠던 시절의 향수를 일깨워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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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대목의 전말을 나는 '어느 날이었다' 라는 상투적인 말로 서두를 삼지 않으면 안 되리라. 그것은 살아오면서 겪음한 바가 적지 않았듯, 길흉화복이건 일상의 범속한 일이었건, 삶의 과정은 무슨 조짐이나 예측이 없이 우연으로 시작되기 예사이고, 종말 역시 그렇게 맺던 것에 바탕하여 하는 말이다. p101

 

* 장정들이 싸우다 죽을 때는 빽이 없어 죽는다고 "빽-" 소리를 지르며 죽어간다던 시절이었다. p166

 

* 모닥불은 계속 지펴지는 데다 달빛은 또 그렇게 고와 동네는 밤새껏 매양 황혼녘이었고, 뒷산 등성이 솔수펑이 속에서는 어른들 코골음 같은 부엉이 울음이 마루 밑에서 강아지 꿈꾸는소리처럼 정겹게 들려오고 있었다. p209

 

* 황소바위 가장자리에 다래가 여물고, 터져 눈송이로 핀 목화대 틈으로 해설피 반짝이는 서릿바람 그림자가 얼룩질 때, 반지르르 살찐 검은 염소는 개랑둑 실버들가지 밑에서 잠들고, 구름 아래에 머문 솔개 한 마리가 온 마을을 깃 끝으로 재어보며 솔푸데기 틈의 장끼 우는 소리를 엿들을 때, 범바위 앞의 찔레덩굴 속에서 피빛 짙은 옻나무 잎을 비켜가며 까치밥을 따먹던 나는 p219

 

* 사람 한평생의 무거리가 말짱 덧없고 부질없는 헛된 놀이판의 작은 자취에 불과하다는, 처음으로 깊고 어두운 허무 속에 빠져들어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p244

 

* 바다는 밤으로 더 가까이 오면서 길잡이 바람만 되돌아가 구름으로 솔면 으레껏 선잠에 들며 늘 그렇던 꿈을 꾸기 시작했다. 달빛이 뚫어지고 별이 새어나오면 어둠을 얼비추며 너울춤이 칠칠하던 바다가, 갈잎에 이슬이 잘게 열리는 밤이면 깬 꿈을 한결같이 다시 잇던 것이다.

 바다의 꿈결은 언제나 뒤숭숭하니 어지럽고 길어 무야(戊夜)로 이울며 샛별이 보이도록 그치지 않았고, 꿈자리가 사나운 탓인지 썰물 때까지는 뒤치락거리는 몸부림으로 천둥과 지동을 비벼 무겁게 신음하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갯둑을 넘보며 넘실대던 사리 썰물이 여러 날 동안 소식이 없는 조금에 이르면, 겨우 해거름만 가신 초저녁부터 그런 꿈자리가 벌어지며 그참 도깨비들의 놀이터가 되던 것이다. 대명(大明)을 피하여 그것들이 낮잠 자러 모이던 소굴은 어디였을까. 어디로 들어가 해동갑하며 잠자다가 하늘의 푸른 기운만 땅에 드리우면 쏟아져나와 그 북새를 피운 거였을까. 그 많은 도깨비들이 저녁마다 논다니패의 난장을 이루던 왕대뫼[大竹山] 곱은탱이의 먹탕곶[黑浦] 개펄과 무저지를 자주 뒤져먹던 사람들도, 결삭은 몽당비 한 자루, 부러진 작대기 한 토막 주웠다는 소문이 없었으니, 그것들은 한 놈도 축나지 않은 채 떼를 이루어 영락없이 먹탕곶 언저리에 숨어 살고 있을 것으로 여겨지건만, 죄 그것들을 꺼려 아무도 가까이 가려 하지 않았음이 분명했다. p254

 

* 세월은 지난 것을 말하지 않는다. 다만 새로 이룬 것을 보여줄뿐이다. 나는 날로 새로워진 것을 볼 때마다 내가 그만큼 낡아졌음을 터득하고 때로는 서글퍼하기도 했으나 무엇이 얼마만큼 변했는가는 크게 여기지 않는다. 무엇이 왜 안 변했는가를 알아내는 것이 더 중요하겠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관촌부락을 방문할 때마다 더욱 절실하게 느껴졌다. p295

 

* 물은 부드러우나 추운 겨울에 얼면 굳어져 부러진다. p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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