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금 지나온 그 자리가 희미한 어둠 속에 웅크리고 있었다. 무너지고 재가 되고 폐허로 변한 곳, 저 잿더미는 죽음일까? 저 사물의 변화는 과연 죽음일까? 끝이 없는 세월과 가이 없는 하늘은 있는 것일까, 없는 것일까? 끝이 없고 가이 없는 것이라면 없을 것이다. 근원의 생명도 항구불멸이라면 근원의 생명이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죽음도 없는 것이다. 다만 영원한 것이 어둠 속, 잠든 이 시각에도 쉬지 않고 숨을 쉬고 있을 뿐이란 말인가. 저 하늘의 별도 숨을 쉬고 있고 거적으로 둘러진 움막 속에 잠든 사람들도 숨을 쉬고 날개를 접은 가냘픈 벌레들도 숨을 쉬고 한 뿌리 풀잎, 한 줌의 흙까지 영겁의 위대하고 묵중한 시간을 호흡하며 더불어 가고 있을 뿐이란 말인가. 영겁으로 흘러가버린, 아니 지금도 흐르고 있을 그 숱한 사람들, 세월과 팔짱을 끼고 가던 사람들, 마음 바닥을 구르며 자신을 밟던 사람들, 그들은 과연 죽은 사람들일까?
'절을 둘러싼 산봉우리 밖에는 세상이 없는 줄 생각했었지....'
그렇게 믿었던 어린 상좌는 좀 더 커서 윤씨부인 가마를 따라 섬진강 강물을 따라서 가느다란 운명의, 세월의 줄을 타고 이곳까지 오지 않았는가. 이곳 언덕에 와서 우뚝 서 있는 한 육신이 과연 자기 자신일까. 길상은 생각해보는 것이다. 한 인간의 육신이 흐느껴지도록 슬프다.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 어찌 이 육신을 살았다 할 수 있으며 떠나간 사람들을 죽었다 할 수 있단 말인가. p68
- 삶과 죽음에 대한 박경리의 생각일듯. 영원한 것은 無와 다르지 않다. 고로, 죽음은 없다. 노장사상에서 비롯된 사고이지 않을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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