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즈음 같이 세상이 온통 어렵고 우울할 때엔 최북의 '공산무인도'와 같은 그림을 보며 잠시나마 세상 근심사로부터 벗어나 마음속으로나마 위안을 얻는 것도 나쁘진 않습니다.
'공산무인도'는 어찌 보면 심심하면서도 나른하기 그지없는 그림입니다. 어느 봄날, 이제 제법 파릇파릇하게 나뭇잎이 돋은 두 그루의 나무 아래에 사람도 없는 텅 빈 초가 정자 옆으로 흐르는 계곡물 소리만 고요한 산속의 정적을 깨뜨리고 있습니다. 이처럼 심심해 보이는 이 그림에서 파격적으로 중앙에 두 개의 낙관과 함께 그림보다 유난히 큰 글씨로 '空山無人 水流花開(공산무인 수류화개)'라고 쓴 화제(畵題)가 눈길을 끕니다.
빈 산엔 아무도 없는데, 물은 흐르고 꽃이 피네.
이 화제는 중국의 유명한 시인 소식의 시구로 이 그림과 절묘하게 들어맞습니다. 그림 중앙에 과감하게 찍은 낙관과 대담한 글씨에서도 알 수 있듯이, 최북은 파격적인 기행으로 점철된 파란 많은 삶을 살았던 화가입니다. 하지만 이 그림은 최북의 성격과 삶에 비춰 볼 때 다소 이채로운 그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최북은 자기 이름인 '북(北)'자를 둘로 쪼개서(七七) 스스로 '칠칠이'라고 하였습니다. 그의 호인 '호생관(毫生館)'도 말 그대로 '붓으로 먹고사는 사람'이라는 뜻이니 그의 괴팍스런 면모를 엿볼 수 있습니다. 그는 메추라기를 잘 그려 '최메추라기'라고도 했고, 산수화에 뛰어나 '최산수'로도 불렸습니다.
최북은 그림 못지않게 기행으로 더 유명합니다. 중인이라는 신분적 한계에 갇혀 예술적 재능을 마음껏 펴지 못하자 술과 그림으로 울분을 달랬던 그는 작은 체구에 눈은 애꾸였습니다. 그래서 늘 한쪽 눈에만 안경을 끼고 그림을 그렸으며, 또한 소문난 술꾼으로 그림을 팔아가며 전국을 돌아다녔습니다. 그는 1712년(숙종 38년)에 출생한 것으로 전하며, 75세 때 겨울날 술에 취해 돌아오는 길에 성벽 아래에 잠들다 그만 얼어 죽었다고 전합니다.
그는 일생동안 심한 술버릇과 기이한 행동으로 점철된 많은 일화를 남겼습니다. 이에 관해서는 남공철(南公轍)의 '최칠칠전(崔七七傳)'과 조희룡(趙熙龍)의 '호산외사(壺山外史)'에 비교적 상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금강산의 구룡연을 구경하고 즐거움에 술을 잔뜩 마시고 취해 울다 웃다 하면서 "천하 명인 최북은 천하 명산에서 마땅히 죽어야 한다."고 외치고는 (마침 다른 사람에 의해 구해졌지만) 물속으로 뛰어든 일이라든가, 어떤 귀인이 그에게 그림을 요청하였다가 얻지 못하여 협박하려 하자 "남이 나를 저버리느니 차라리 내 눈이 나를 저버린다"라고 하며 송곳으로 한쪽 눈을 찔러 멀게 해 버린 이야기 등은 그의 괴팍한 성격을 단적으로 알려 주는 대표적인 일화라 하겠습니다.
그래서 당시의 사람들은 그를 미치광이라고까지 말하였으나, 그가 용돈이 궁해 평양이나 동래 등지로 그림을 팔러 가면 많은 사람들이 그의 그림을 구하려고 모여들었다고 합니다. 그는 김홍도(金弘道), 이인문(李寅文), 김득신(金得臣) 등과 교유하였으며, 원말 사대가(元末 四大家)의 한 사람인 황공망(黃公望)의 필법을 따랐다고 합니다.
이름난 시인이던 석북(石北) 신광수(申光洙, 1712~1775)는 '최북의 설강도(雪江圖)에 부치는 시'에서 그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장안에서 그림 파는 최북이를 보소.
살림살이란 오막살이에 네 벽은 텅 비었네.
유리 안경 집어 쓰고 나무 필통 끌어내어
문을 닫고 종일토록 산수화를 그려대네.
아침에 한 폭 팔아 아침밥을 얻어먹고
저녁에 한 폭 팔아 저녁밥을 얻어먹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