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調

서용보

無不爲自然 2014. 1. 17. 22:52

다산의 살리에르, 서용보

 

정약용의 경기도 암행어사 시절, 서용보의 악행을 고발하게 되고, 서용보는 이에 앙심을 품고 정약용의 관직 진출을 평생 막는 것에 생을 헌신하게 됩니다. 서용보도 나름 18세인가에 과거급제를 하는 등, 천재 소리를 듣고 자랐는데, 5살 어린 정약용이란 놈이 나타나서는 자신 보다 더 천재로 인정받고 정조의 총애도 받습니다. 나름대로 쌓인 게 있었겠죠. 항상 천재 주변에는 이러한 인물들이 있습니다. 마치 모차르트와 살리에르의 관계라고나할까?

 

1803년 조정에서 강진에 유배 중인 다산을 해배시키자는 논의가 있었으나 당시 좌의정이었던 서용보는 결사반대합니다. 1818년 다산이 해배되는데, 그 해가 바로 서용보가 벼슬에서 물러난 해입니다. 결국 다산의 살리에르인 서용보는 다산의 3년 유배 생활을 18년까지 늘려준 장본인이죠. 정약용이 해배 된 후에는 이웃에 살던 서용보가 정약용에게 서찰을 보내‘해배 되셨으니 조정에서 일을 하셔야 할텐데..’라고 말하지만 서용보는 실상, 역시나 그의 조정진출을 결사 반대합니다.

 

이를 두고 어느 누리꾼은 최시중 방통위원장이 정연주 전 KBS사장에게 ‘미안하다. 축하한다’라는 말을 한 것과 비교를 하기도 했습니다. ‘역사는 때로 너무 잔인한 형태로 반복되곤한다’

(출처: http://blog.daum.net/platanus2005/15759985 )

 

만약 서용보가 없었다면, 다산 선생이 조정에서 많은 일을 했을겁니다. 그의 수원화성 축조 때의 기중기 만든 것 등을 보면, 만약 그가 조정에서 일을 더 했었더라면 실학이 사상에서 머무르지 않고 통치에도 좀 더 적용되지 않았을까하는 생각도 듭니다. 물론 학자로서의 정약용은 성공적이었지만, 관료로서의 정약용은 실패했었을 수도 있겠지요.

 

 

[간략연보]

1세 (1757년, 영조33) 판서 아버지 밑에서 유복하게 태어남

18세 (1774년, 갑오년) 생원시 합격, 증광문과 병과로 급제

27세 (1783년, 계묘년) 규장각 직각

36세 (1792년, 임자년) 사은부사로 청나라 다녀옴

43세 (1799년, 기미년) 예조판서

44세 (1800년, 경신년) 순조 즉위년에 우의정

46세 (1802년, 임술년) 좌의정

49세 (1805년, 을축년) 사은정사로 청나라 다녀옴. 낙향

63세 (1819년, 기묘년) 영의정으로 복귀

68세 (1824년, 갑신년) 사망

 

간략연보를 통해 알 수 있듯이 한 마디로 엄친아였습니다. 출생도 유복, 성장도 유복, 정조 사망 후에는 더 유복하여 순조 시절엔 우,좌,영의정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를 죽인 세력인 노론벽파인 심환지와 서용보. 정조는 이들 계보를 뿌리째 뽑는 대신, 이들과 밀서를 주고받으며 소통했습니다. 정치의 논리를 아는 군주였죠. 아마 물밑에서 벽파와 정조가 소통했을 것이라 생각들은 많이 했었지만, 2009년에 심환지 가문에서 발견된 정조와 심환지 사이에 주고받았던 밀서가 공개됨으로해서 이는 사실로 입증됩니다. 그 서찰에는 이 글은 읽는 즉시 없애라는 정조의 말이 있었지만, 나중에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 때문에 심환지는 이 밀서를 고이고이 간직하게 되고, 2009년에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었었죠. 이 문서가 나왔을 때, 기존의 사학계에서 눈엣가시인 이덕일 역사학자의 주장이 틀렸다는 증거라 하면서 발표를 했었고, 이덕일 선생은 오히려 이 밀서가 자신의 주장이 맞다는 증거라는 논쟁이 있었던걸로 기억합니다. 이덕일 선생의 주장은 정조가 심환지로 대변되는 벽파에 의해 살해 당했었다는 것이었죠.

 

 

출처 http://cafe.daum.net/reedoo/LrpC/17?q=%BC%AD%BF%EB%BA%B8&re=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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