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인의 후예
산에 오르며 가끔씩 되뇌어 보고하던 말이 이 소설의 제목이였다. 산이 그렇듯이 거기에서 자라나는 나무는 비탈에서 자랄 수 밖에 없으려니 무심히 넘겨짚으며 어떤 내용의 소설일까? 하는 궁금증만 품고 있었다.
'나무들 비탈에 서다'는 <사상계> 1960년 1~7월에 연재된 황순원의 대표적 장편소설이다.
여기서 나무들은 6.25동란을 겪으며 상처 받은 젊은이들이고 비탈은 위태로운 상황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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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죽어가는 사람 같지 않게 이런 말을 했다. 한창 따가는 판에 파장된 노름판 기분이군. p304
* 살아남은 사람이 죽은 동료에 대해 어두운 그늘을 나타내고 그 밑에 번지는 자기네들의 삶에 대한 희열을 삼가 숨긴다는 것은 하나의 인정에서 오는 예의였다. p306
* 햇볕이 구김살 없이 내리쬐고 있었다. p308
* 하늘에는 얼음을 부스러뜨려 뿌린 듯한 차가운 별들이 박혀 있었다. p395
* 전정을 해줘야, 이크 몸이 이렇게 잘리어서야 앞날두 얼마 남지 않은 것 같다, 어서 열매를 맺어 종족이나 보존해야겠다, 하구서 열매를 많이 연다지 거지. 그러면서 우리 사람을 두구 봐두 마찬가지라는 거야, 대체루 부유한 집엔 자식이 바르고 가난한 집엔 자식이 많은 것두 그런 본능에 기인한다는 거야. (중략)
제목은 [과수나무의 전정과 인류의 장래]. 어때? 이 논문에서 난 인간에 있어서두 전정을 해줘야 할 층과 그냥 좀 여유 있이 자라게 내버려둬야 할 층이 있다는 걸 명시해논 뒤에 이 두 층의 조절을 잘 하지 않는 한 인류는 머지않아 멸망할 날이 있다는 걸 암시해놀 작정야. p406
* 인간관계 치고 궁극적인 의미에서 어떤 형태로든 상처라는 걸 면할 수 있는 길이 있을까. 크고 작고 심하고 덜한 차이나, 외적인 것과 내적인 것, 의식적인 것과 무의식적인 것의 다름은 있을 망정 서로 어떤 상처를 주고받지 않고서는 무릇 인간관계란 성립되지부터 않는 성싶다. 그것이 친구 간이든 남녀 간이든 심지어는 부모 자식 간이라 하더라도 이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그저 우리가 이런 상처 속에서도 그냥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것은 그것들을 망각하기에 애쓰고 또한 거기에 익숙해진 때문인 것이다. p440
황순원(1915~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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