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지 13 / 박경리 / 마로니에북스
* 부처는 대자대비라 하였고 예수는 사랑이라 하였고 공자는 인이라 했느니라. 세 가지 중에는 대자대비가 으뜸이라. 큰 슬픔 없이 사랑도 인(仁)도 자비도 있을 수 있겠느냐? 어찌하여 대비라 하였는고, 공(空)이요 무(無)이기 때문이며 모든 중생이 마음으로 육신으로 진실로 빈자이니 쉬어갈 고개가 대자요 사랑이요 인이라. 쉬어갈 고개도 없는 저 안일지옥의 무리들이 어찌하여 사람이며 생명이겠는가......
마음으로 육신으로 고통받는 자만이 누더기를 벗고 깨끗해질 것이며 뱃가죽에 비계 낀 저 눈물 없는 무리들이 언제 그 누더기를 벗을꼬, 고달픈 육신을 탓하지 마라, 고통의 무거운 짐을 벗으려 하지 마라, 우리가 어느 날 어느 곳에서 만나게 된다면 우리 몸이 유리알같이 맑아졌을 때일까.... 그 만남의 일순이 영원일까....
후회는 없겠구나. 내 생전에도 후회는 아니했으니, 한이야 지가 어디로 갔겠나.... 한이야 후회하든 아니하든 원치 않든 모르는 곳에서 생명과 더불어, 내가 모르는 곳, 사람 모두가 알 수 없는 곳에서 온 생명의 응어리다. 밀쳐도 싸워도 끌어안고 울어도, 생명과 함께 어디서 그것이 왔을꼬? 배고파서 외롭고 헐벗어서 외롭고, 억울하여 외롭고 병들어서 외롭고, 늙어서 외롭고 이별하여 외롭고, 혼자 떠나는 황천길이 외롭고, 죽어서 어디로 가며 저 무수한 밤하늘의 별같이 혼자 떠돌 영혼, 그게 다 한이지 뭐겠나. 참으로 생사가 모두 한이로다....... p45
토지의 배경이 되는 시대와 지금은 백년 남짓한 세월이 흘러갔지만, 변화가 너무 빠르다. 타임머신이라도 타고 그 시대로 간다면 별세상이라도 구경하는 듯 색다른 흥취가 있겠다. 사람들 살아가는 생활사도 변화가 빠르지만, 그 시절에 쓰던 속담이나 유행어도 지금은 거의 쓰지 않는다. '이불 밑에서 활개치기' '강약이 부동이다' '혀는 짧아도 침은 길게 뱉는다' '처성자옥(妻城子獄)' '청풍당석(淸風當席)' '김 안 나는 물이 더 뜨겁다' '노류장화' '새알심같이 말이 똑똑 떨어진다' '실이 노이 되다' 자주 듣지 않아서 한 번 더 생각해봐야 감이 온다. 지금은 영어가 섞이지 않으면 대화가 되지 않는 시대지만, 그 시절에는 한자어나 일본어가 그랬다. 백년 후에는 또 어떤 나라 말이 주종을 이룰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