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미동 사람들 - 양귀자
한때 열심히 봤던 '인간극장'이라는 프로에 나올 법한 우리 주변의 평범한 서민들의 서글픈 이야기.
그 이야기에 나는 나오지 않았지만 남의 이야기같지 않아 한때 빠짐없이 열심히 봤었다.
1987년에 발표된 소설이다. 노래만큼은 아니지만 소설도 70~80년대에 발표된 소설들이 정이 더 간다.
멀고 아름다운 동네, 원미동(遠美洞)으로 터전을 옮겨가는 가난한 부부 이야기로 소설은 시작한다.
부천시 원미동은 실존하는 동네이다.
서울특별시민이 되지 못하고 경기도민으로 떨궈져 나간 사람들.
모든 생명이 그러하듯이 간신히 겨우 살아가는, 아니 살아내고 있는 사람들.
80년대의 가난하지만 희망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 그들의 희망은 살림살이가 좀 나아지는 것이다.
그럼 우리 시대는 무슨 희망을 품고 살아야하는걸까?
언제까지 살림살이가 나아지는 걸 바라는 천민자본주의적인 희망을 품고 살아야하는건지.
마지막 단편인 '한계령'은 작가 자신의 이야기일게다.
한계령이라는 노래가 있고 그 전에 詩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되었다.
시인 정덕수의 '한계령에서'가 자양분이 되어 노래로 소설로 새로이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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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게 수도 없이 이사를 다니며 얻은 결론은 한 가지, 집이 없으면 희망도 없다는 사실이었다. 희망이란, 특히 서울에서 살고 있는 이들에게 희망이란 집과 같은 뜻이었다. p26
* 그렇다고 몸뚱이로 먹고살 수 있냐 하면 그것도 어림없어. 우리 몸뚱이는 이미 삭았어. 술에 삭고 눈치에 삭고 같잖은 지식에 삭고. 숟가락 들어올리는 일도 귀찮은 몸이야. p158
* 두 발로 서서 돌아다니는 사람보다 더무서운 것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기까지는 아직도 한참을 더 기다려야 할 나이였다. 단지 인간이라는 이름 때문에 노출되고 공격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한 이 사회에서 불안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스스로 벌레가 되는 것임을 알기에도 오랜 세월이 필요할 것이다. p177
* 한 사람에게는 멍에같은 곳이 또 다른 누구에게는 새로운 내일의 출발점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p221
* 이층으로 오르는 계단은 넓고 안전하게 설계되지만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은 금방이라도 고꾸라지게 만들 작정으로 설계된 듯이 보였다. p261
* 데모하다 학교에서 잘리고 군대에 다녀온 청년은 "언제나 중얼중얼 시를 외우며" 반미치광이로 살아가고(원미동 시인), "이 세상의 모든 이들이 가능하기만 하다면 평등하게, 그리고 따뜻한 마음을 나누면서 살아야 한다"(방울새)고 생각하는 사람은 감옥에 갇히며, 출장을 간 도시에서 "인간의 얼굴을 한 수많은 짐승의 무리들"을 보고 "깊은 내상(內傷)"(한 마리의 나그네 쥐)을 입은 사람은 정처 없이 원미산을 나그네 쥐처럼 떠돌다 죽습니다. p3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