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 일의 즐거움 -헤르만 헤세
헤르만 헤세의 소설을 서너권 정도는 읽었다.
소설로 접한 헤르만 헤세는 코드가 잘 맞는 작가라는 느낌까지는 없었다.
기회가 되면 그의 작품을 좀 더 읽어보리라는 생각만 있었는데
인터넷 헌책방을 기웃거리다가 우연찮게 [정원 일의 즐거움]이라는 책을 구입하게 되었다. 그것도 아주 착한 가격에.
정원을 가꾸며 꽃과 나비와 대화를 나누며 살아가는 일상을 시로.. 이야기로.. 수필로.. 편지로..그리고 그림으로 담담하게 써내려간 책이다.
갓 모습을 드러낸 노란 꽃들은 수줍은 듯 즐거운 듯 생명에 대한 용기를 내어 풀숲에 숨은 채 어린 눈을 열어 고요하고도 기대에 찬 세계를 바라보고 있다. p10
정원에서의 생명체의 덧없는 순환을 다른 어느 곳에서보다 분명하고 명확하게 볼 수 있다. 생명이 움텄는가 싶으면 벌써 쓰레기와 시체들이 널린다. p16
모든 걸음은 탄생이다. 모든 걸음은 죽음이며, 모든 무덤은 어머니이다. p54
최근 흘러내리는 가을비 속에서 사랑하는 친구를 무덤 속에 파묻고 그의 관이 차가운 구덩이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았을 때, 나는 죽음이 그에게 위안이 되었으리라고 느꼈다. 그는 비로소 안식을 찾은 것이었다. 그는 자신을 다정하게 대해 주지 않았던 이 세계로부터 떨어져 나갔다. p74
가장 무상한 것이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것이며, 죽음이야말로 아름다운 꽃피움이며 너무도 사랑스러운 것일 수 있네. p102
삶이 유혹하는 소리, 어린 시절부터 날마다 그를 부르며 그의 발검음을 끊임없이 앞으로, 또 앞으로 몰아세웠던 그 유혹의 소리는 점차 저세상에서 부르는 죽음의 소리로 변해 가고 있었다. p222
자연의 끊임없는 순환.. 시작의 기대감과 종말의 덧없음.. 생명이 무생명이 되고.. 무생명이 생명이 되는..
한때 모든 죽음은 패배라는 말에 공감했었는데..
인간은 결국 패배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기에 비애를 안고 살아가는 것이라고..
헤르만 헤세 소설속의 주인공들의 죽음은 단지 패배만은 아니였다.. 그저 자연스러운 순환일 뿐..
건강함, 씩씩함, 생각 없는 낙관주의, 모든 심각한 문제들을 웃으면서 거부하기, 공격적으로 던지는 질문을 겁내며 거부하기, 순간을 즐기는 삶의 기술. 이런 것들이 우리가 사는 시대의 슬로건이다. 이런 식으로 이 시대는 세계 대전을 치른 부담스러운 기억을 허위 속에 잊어버리려고 한다. 마치 아무런 문제가 없는 듯이 과장 섞인 행동을 하고, 미국적인 것을 모방한다. 살진 아기로 분장한 배우처럼 더할 수 없이 바보처럼 군다. 그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행복해하면서 환하게 웃는다. 영어로 '스마일링'이라고 하던가. 그런 낙관주의가 판을 친다. p91
안락함만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현대인들.
아직도 소비가 미덕이고 경제발전의 원동력이라고 믿는 이들이 있을까?
그런 이들은 평생 무엇인가를 생산해 본적은 있을까?
현대인들이 느끼는 아름다움이 승용차의 곡선라인이 우선시되어가는 세태가 안타깝다.
美를 그런 곳에서 찾다니.
풍경은 여러 겹으로 흐릿하게 변화하는 빛 속에서 마치 현실로부터 떨어진 듯 황홀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아무런 기억을 담지 않은 창백한 영혼의 세계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가까이에 존재하는 어떠한 것들보다도 진실하고 더 오래 지속될 듯한 안정감을 주었다. p219
따뜻한 비가 촉촉이 내려 적시는 조용한 회색의 날들이 계속되었다. 그후에 남풍이 습한 하늘에 현란한 구름무리를 휘몰아왔다. 그을음처럼 검은 그림자와 눈을 찌를 듯 하얀 햇빛이 엇갈리며 기나갔다. 마치 성난 듯 서로 뒤섞이며 흘러가는 구름층 사이에서 부드럽고 그리움이 넘치는 봄의 파란 하늘 조각들이 엿보였다. p248
여름의 뜨거운 열기가 마구 날뛰고 숲의 새들도 침묵을 지킬 때면,
우울하거나 고통스럽거나 일이 잘못돼 방을 뛰쳐나왔을 때,
짓궂은 사람이 보낸 얄미운 편지가 나를 화나게 했을 때,
아, 너 푸른 은신처는 항상 쾌활하고 선량하게 맞아주었다. p149
지상 최고의 진선미는 그린이다.
참되고 착하고 아름다운 그 공간이 자꾸만 줄어들고 있다.
이제는 여름 휴가를 위한 공간도 산과 바다보다는 워터파크를 찾는 사람들이 늘고있다.
하지만 인간관계에서 오는 배신감을 위로받고 싶을때 산만한 곳을 나는 알지 못한다.
소유란 무엇이든지 제한적인 것이었다. 모든 것을 이해한다는 건 바로 체념했다는 뜻이다. 그리고 모든 것을 체념하는 일은, 미소와 명상을 통해 성스럽게 변모되어야 가능한 것이었다. p221
젊었을 때는 자신이 많이 고독하다고 느끼는 법이다. 그리고 고독한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하지. 그래서 친구들을 찾아 나서고, 사랑에 빠지고, 가족과 조국을 찾는다. 그것은 참 좋은 일이다. 그 덕에 세계가 번영하는 거니까. 그렇지만 나이가 들 만큼 들면 그런 것들이 더는 마음을 채워주지 못한다. 그때 가서는 우정과 사랑, 조국은 우리를 다른 것으로부터 분리시키고, 전체로부터 떼어놓은 껍질 같은 것에 지나지 않게 된단다. p246
꽃들이 피어나 우리와 우리의 근심을 비웃고 있습니다. p209
집안에 틀어박혀 눈을 긴장시켜 가며 글을 쓰는 일은, 신경을 곤두세우게 하고 내게 심한 부담을 준다. 그러다가 자칫 정말 고약한 통증을 느끼게 되기도 합니다. p193
평소 글쓰기의 난감함을 절실하게 느끼는 일인인지라. 헤르만 헤세쯤 되면 누가 불러주면 그냥 받아 적어내려갈거라고 생각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