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약국의 딸들 - 박경리
김약국의 딸들(나남창작선 29)
저의 아버지는 고아로 자라셨어요. 할머니는 자살을 하고 할아버지는 살인을 하고, 그리고 어디서 돌아갔는지 아무도 몰라요. 아버지는 딸을 다섯 두셨어요. 큰딸은 과부, 그리고 영아 살해혐의로 경찰서까지 다녀왔어요. 저는 노처녀구요. 다음 동생이 발광했어요. 집에서 키운 머슴을 사랑했죠. 그것은 허용되지 못했습니다. 저 자신부터가 반대했으니까요. 그는 처녀가 아니라는 험 때문에 아편쟁이 부자 아들에게 시집을 갔어요. 결국 그 아편쟁이 남편은 어머니와 그 머슴을 도끼로 찍었습니다. 그 가엾은 동생은 미치광이가 됐죠. 다음 동생이 이번에 죽은 거예요. 오늘 아침에 그 편지를 받았습니다. p365
1962년 발표된 장편소설로 대강의 줄거리는 마지막 부분에 배신을 당하고 혼기를 놓쳐 노처녀가 된 둘째딸 용빈이가 독백을 하듯 새로 사귀기(?) 시작하는 남자에게 위와 같이 말한다.
삼대에 걸친 이야기인 만큼 그 방대한 시간을 한 권의 책으로 담기 위하여 이야기가 스피드하게 전개된다. 그러한 속도감이 손 놓기가 쉽지 않게 만든다.
걷잡을 수 없이 휘몰아치는 어두운 운명의 바람을 피하지 못하고 풍비박산이 나버리는 김약국(김성수) 일가의 씁쓸한 이야기.
운명론자는 아니지만 운명에 대해서 한번쯤 생각하게 만든다.
운명의 여신이 그의 풍만한 가슴만큼이나 함박웃음을 짓고 있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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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는 그를 신격화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약한 인간들의 지배를 받고 있다. 그의 권위를 빌려서 인간들을 지배하고자 한 자들에게 너는 우롱을 당하고 있다. p148
* 인간은 개인으로 살았고 개인으로 죽었다. 어떤 변혁이 와도 인간은 의연히 개인으로 대처한다. 개인이 질 때도 있다. 그 사회의 변혁이란 역사를 위해서 혹은 어느 집단을 위해서 있었다고 생각지 않아. 개인을 위해, 개인의 생활을 위해 있었다. p186
* 일찍이 민족의 정의가 승리한 일은 없었다. 힘이 승리했었지. 카르타고의 시민이나 한니발은 애국심이 모자라서 멸망하였느냐? 대영제국은 정의의 기치 아래 그 방대한 식민지를 획득하였느냐? 어떠한 사상이나 이념 따위는 일 없는 사람들의 소일거리지 p187
* 축복해 주는 것이 이별을 아름답게 하는 것, 나도 그건 알아. 그렇지만 난 널 미워하겠다. 오래 가지는 않을 거야. 미움이 말이야. p206
* 아픈 상처는 혼자 남몰래 간직하고 싶은 것이다. 남의 설움을 따스하게 만져주지 못함과 마찬가지로 자기의 고통도 혼자만이 지녀야 한다는 일종의 고집이다. (중략) 자아 속에서 시름하던 그는 타아(他我)의 인과를 발견하고 타아를 위하여 헛되게 보낸 세월을 후회하는 것이었다. p302
* 잡풀이 우거진 뜰안에는 들쥐들이 판을 치고 사람을 업신여기듯 도망도 치지 않았다. p314
박경리(1926~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