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

팡세 - 파스칼

無不爲自然 2011. 12. 11. 10:58

 


팡세(세계문학전집83)

저자
파스칼 블레이즈 지음
출판사
민음사 | 2003-08-25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파스칼의 명저 팡세. 현대에 이르기까지 프랑스 사상사에 가장 큰...
가격비교 글쓴이 평점  

 

 

 책 읽기를 게을리했던 유년시절에 대한 반성의 의미로 요근래 몇몇의 책들을 접하다가 그 책들 속에 팡세가 인용되어 있길래 다음에 읽을 책으로 메모를 해두었었다. 팡세의 뜻풀이부터 먼저 하자면 '생각'이라는 뜻이다. 내용은 파스칼이 남긴 991개의 '단장'이라고 불리우는 생각들의 메모이다. 책의 골자는 앞부분은 인간의 본성에 대한 탐구이고 뒷부분은 신과 성경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지만 관심이 가지지 않아서 띄엄띄엄 읽어버렸다.

 

 뒤는 켜녕 옆도 보기 힘들뿐더러 앞만 보고 달려가도 낙오하기 쉬운 냉혹한 현대의 도시 문명의 사회에서 그동안 전혀 생각해 보지도 않았고 생각할 틈도 없었던 화두를 던져주고 있다.

 

391 - 인간은 자연에서 가장 연약한 한 줄기 갈대일 뿐이다. 그러나 그는 생각하는 갈대이다. 그를 박살내기 위해 전 우주가 무장할 필요가 없다. 한번 뿜은 증기, 한 방울의 물이면 그를 죽이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우주가 그를 박살낸다 해도 인간은 그를 죽이는 것보다 더 고귀할 것이다. 인간은 자기가 죽는다는 것을, 그리고 우주가 자기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우주는 아무것도 모른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존엄성은 사유(思惟)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가 스스로를 높여야 하는 것은 여기서부터이지, 우리가 채울 수 없는 공간과 시간에서가 아니다. 그러니 올바르게 사유하도록 힘쓰자. 이것이 곧 도덕의 원리이다.

 

 누구나 한번은 들어보았을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이다.'의 출처로 팡세에서 가장 유명한 구절일 것이다. 팡세는 인간의 본성에 대해 몇가지(모순성, 불완전성,비참,위대 등등)로 나누어서 탐구하고 고찰하고 있다. 인간의 위대함과 비참함을 풍자적이고 간결하게 보여주는 말이다.

 

343 - 무한에 하나를 더해도 조금도 무한을 증가시키지 않는다. 무한한 길이에 한 자를 더해도 마찬가지다. 유한은 무한 앞에서 소멸되고 순전한 무가 된다. 우리의 이성도 신 앞에서 마찬가지이고 우리의 정의도 신의 정의 앞에서 그러하다.(중략) 우리는 신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신이 존재한다는 것은 충분히 알 수 있다.(중략) 신이 있다는 패를 택한 다음 득과 실을 저울질해 보자. 다음 두 경우를 생각해 보자. 만약 당신이 이긴다면 모든 것을 얻게 되고, 당신이 지는 경우에도 당신은 아무것도 잃지 않는다. 그러니 주저하지 말고 신이 있다에 걸어라. 

 

336 - 세 부류의 사람들만이 있다. 신을 발견한 다음 신을 섬기는 사람들, 신을 발견하지 못하였기에 온 힘을 다하여 신을 찾는 사람들, 신을 찾지도 발견하지도 않은 채 살아가는 사람들, 첫째 사람들은 합리적이고 행복하고, 마지막 사람들은 불합리하고 불행하다. 중간 사람들은 불행하지만 합리적이다.

 

 팡세에서 두번째(나의 기준)로 널리 알려진 '신이 있다는 패에 걸어라'가 나온다. 천재적인 수학자이자 물리학자답게 합리적인 선택을 우리들에게 권고하고 있다. 파스칼은 사람을 세 부류로 분류하였지만 나는 거기에 하나를 더 추가하고 싶다. 신을 발견하지도 않은 채로 섬기는 사람들을 추가하고 싶다. 신을 발견하였다면 그렇게 추악하게 살지는 않을 거 같고 교회를 다니는 걸로 봐서는 섬기는 건 맞는 듯한 사람들을 어렵지 않게 주위에서 볼 수 있다. 파스칼은 첫번째 부류가 되고 싶었던 두번째 부류에 해당하는 사람이였지 않을까?싶은데 혹자는 팡세를 '미완성의 성경'이라고 평하기도 하니 아마도 뒷부분을 띄엄띄엄 읽어버려서 그런 생각을 갖게 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동안 행복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 동감이 되기도 하지만 행복을 위해서 신을 발견하고 싶진 않다.

 

122 - 불의.   그들은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으면서 자신들의 욕망을 만족시킬 다른 방도를 발견하지 못하였다.

186 - 인간의 결함은 사람들이 수많은 미(美)를 만들어내는 원인이다.

257 - 인간은 천사도 아니고 짐승도 아니다. 불행하게도 천사가 되려는 자가 짐승이 된다.

 

 서른 아홉의 짧은 인생을 살아서 그런지 번역이 그런건지는 몰라도 정화되지 않은 거칠은 표현들도 상당히 많다. 혐오, 분노와 같은 격정적인 단어들이 많다. 불완전한 인간의 본성을 발견한 한 인간의 비참함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가끔은 삶도 죽음도 아무것도 모르는 한 마리 행복한 짐승으로 살고 싶다.

 

- 어휘공부 -

 

5 - 사람을 유익하게 꾸짖고 그의 잘못을 깨우쳐주려고 할 때는 그가 어떤 방향에서 사물을 보는가를 관찰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그 방향에서 사물을 보면 대체로 옳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에게 옳은 점은 인정하되 그것이 어떤 면에서 틀렸는가를 보여주어야 한다. 그는 이에 만족을 느낄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가 틀린 것이 아니라 단지 모든 면을 보지 못했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모든 것을 보지 못하는 것에는 화내지 않지만 틀렸다는 말은 듣기 싫어한다. 아마도 그 이유는 본래 사람은 모든 것을 볼 수 없고 또 그가 사물을 바라보는 그 방향에서는 본래 틀리는 법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감각이 인지하는 것들은 항상 진실된 것이므로.

7 - 습관이야말로 가장 강력하고 가장 신뢰는 증명을 이룬다. 내일 해가 뜨고 또 우리가 죽을 것이라고 그 누가 증명하였는가. 그런데 이보다 더 확실히 믿는 것이 어디 있는가. 그러므로 우리를 그렇게 믿게 하는 것은 습관이다.

8 - 한 작품을 만들 때 최후로 깨닫는 것은 무엇을 제일 먼저 써야 할지를 아는 일이다.

* 공박 2[攻駁][명사] 남의 잘못을 몹시 따지고 공격함.

11 - 그들 자신, 그들의 영생, 그들의 전 존재가 관련된 문제에 대한 이 무관심은 나에게 측은한 마음을 일으키기보다 나를 분노하게 한다. 이것은 나를 경악시키고 소름 끼치게 한다.(중략) 내가 아는 모든 것은 내가 곧 죽으리라는 것,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내가 모르는 것은 이 피할 수 없는 죽음 그 자체다.(중략)일자리를 잃었거나 명예를 훼손당한 듯한 느낌 때문에 몇 날 몇 밤을 분노와 절망속에서 보내는 바로 그 사람이 죽음에 의해 모든 것을 잃는 다는 것을 알면서도 불안도 동요도 느끼지 않는 것이다.

* 구속 4[救贖][명사] [기독교]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인류의 죄를 대속(代贖)하여 구원함.

12 - 무지 속에서 평안을 누린다는 것은 흉칙한 일이다.

13 - 부정하기에는 너무나도 많은 것을, 그리고 확신하기에는 너무나도 적은 것을

* 개탄 [慨歎/慨嘆][명사] 분하거나 못마땅하게 여겨 한탄함. ‘탄식’으로 순화.

* 중보자 [仲保者] [기독교]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서서 그 관계를 성립시키고 화해를 가져오는 역할을 하는 사람. 예수를 이른다.

68 - 사람들은 지나가는 마을에서는 굳이 존경받으려고 마음 쓰지 않는다. 그러나 잠시라도 머물러야 할 때는 그렇게 되려고 마음을 쓴다. 얼마 동안이나? 헛되고 연약한 우리의 체류에 알맞는 한동안.

77 - 원래의 대상은 조금도 찬양받지 않은데 닮았다는 것으로 찬양받는 그림이란 얼마나 공허한 것인가!

81- 상상력이 이성과는 다른 방식으로 자기 주인들의 마음을 완전한 만족으로 채우는 것을 볼 때 이보다 더 우리를 화나게 하는 일은 없다. 상상적으로 유식한 사람들은 이성적으로 유식한 사람들보다 훨씬 더 자기 만족을 느낀다. (중략) 상상력은 영광으로 감싸고 이성은 치욕으로 덮는다.

* 극창 [劇唱][명사] [음악] 같은 말: 판소리.

84 - 우리는 결코 현재에 매달리지 않는다. 우리는 마치 오는 것이 너무 더디기라도 한 듯, 그리고 그 걸음을 재촉하려는 듯 미래로 앞서나간다. 또 우리는 마치 사라지는 것이 너무 빠르기라도 한 듯 과거를 정지시키기 위해 그것을 되살린다.

94 - 허영은 사람의 마음속에 너무나도 깊이 뿌리박혀 있는 것이어서 병사도 상것도 요리사도 인부도 자기를 자랑하고 자기를 찬양해 줄 사람들을 원한다. 심지어 철학자도 찬양자를 갖기 원한다. 이것을 반박해서 글쓰는 사람들도 훌륭히 썼다는 영예를 얻고 싶어한다. 이것을 읽는 사람들은 읽었다는 영광을 얻고 싶어한다. 그리고 이렇게 쓰는 나도 아마 그런 바람을 가지고 있는지 모른다. 그리고 아마도 이것을 읽을 사람들도.......

97 - 인간의 모든 활동은 재물을 갖는 데 있다. 그러나 인간은 재물을 정당하게 소유할 근거도 없고 확실하게 소유할 힘도 없다. 학문도 쾌락도 마찬가지이다. 우리에게는 진리도 행복도 없다.

99 - 결함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은 틀림없이 불행한 일이다. 그러나 결함으로 가득 차 있으면서 그것들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은 더 큰 불행이다. (중략) 어떤 왕이 전 유럽의 웃음거리가 되고도 자기만은 이것을 모를 수도 있다. 나는 조금도 놀라지 않는다. 진실을 말하는 것은 듣는 사람에게는 유익하지만 말하는 사람에게는 해롭다, 미움을 사기 때문에. 그런데 왕과 함께 사는 사람들은 그들이 섬기는 왕의 이익보다 자신들의 이익을 더 소중히 여긴다. 따라서 자기를 해치면서까지 왕의 이익을 도모할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는다.

105 - 지나치게 자유로운 것은 좋지 않다. 필요한 모든 것을 갖는 것은 좋지 않다.

108 - 어떤 사람은 법의 본질은 입법자의 권위라고 말하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은 통치자의 편의라고도 하고 현재의 습관이라고도 한다.

119 - 모순.   모든 비참과 균형을 이루게 하는 자존심. 인간은 자신을 비참을 숨긴다. 그렇지 않고 이것을 드러내 보일 때는 이것을 아는 것으로 자랑 삼는다.

120 - 자기 자신을 알아야 한다. 이것이 진실을 찾는데 유용하지 않다면 적어도 자신의 삶을 규제하는 데는 유용하다. 이보다 더 옳은 일은 없다.

121 - 현재의 쾌락이 거짓이라는 느낌, 아직 경험하지 못한 쾌락의 공허를 모르는 무지 ---- 이것이 변덕스러움의 원인이다.

122 - 불의.   그들은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으면서 자신들의 욕망을 만족시킬 다른 방도를 발견하지 못하였다.

154 - 만약 모든 사람이 자기들에 대해 서로 말하는 것을 안다면 이 세상에는 거의 친구가 없으리라는 것을 나는 사실이라고 믿는다. 가끔 남이 말한 것을 경솔하게 고자질함으로써 싸움이 야기되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164 - 자연을 우리의 기준에서가 아니라 자연 자체로서 판단해야 한다.

166 - 우리가 덕(德) 가운데서 우리를 지탱할 수 있는 것은 우리 자신의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두 개의 상반된 부덕(不德)의 균형에 의해서이다. 그것은 마치 맞부는 두 바람 사이에 우리가 똑바로 서 있는 것과 같다. 어느 한 부덕을 제거해 보라, 우리는 다른 부덕 속에 떨어진다.

183 - 우리는 인간이 본질적이지 않은 것들을 존중한다는 사실로써 인간의 공허함을 보여주었다.

185 - 몸치장을 하는 것은 자신의 힘을 과시하는 것이다.

186 - 인간의 결함은 사람들이 수많은 미(美)를 만들어내는 원인이다.

192 - 힘없는 정의는 무력하고 정의없는 힘은 폭력이다.

196 - 그들이 정치에 대해 쓴 것은 마치 정신병원의 규칙을 만들기 위한 것과 같았다.

218 - 인간의 위대는 자신이 비참하다는 것을 아는 점에서 위대하다. 나무는 자기가 비참하다는 것을 모른다.

221 - 그 누가 입이 하나밖에 없는 것을 불행하게 여기겠는가, 그리고 그 누가 눈이 하나밖에 없는 것을 불행하게 생각 안 하겠는가. 우리는 세 개의 눈을 갖지 않았다는 이유로 괴로워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눈이 하나도 없을 때는 위로받지 못한다.

229 - 극도의 용맹과 극도의 인자함을 가졌던 에파미논다스처럼, 용맹성과 같은 어떤 과도한 덕(德)이 그 반대되는 과도한 덕을 함께 가지고 있지 않으면 나는 이것을 찬양하지 않소. 그렇지 않으면 위로 올라가지 않고 아래로 내려가니까요. 사람이 자신의 위대함을 보여주는 것은 어떤 극단에 도달함으로써가 아니라 동시에 두 극단에 닿을 때 그리고 양자의 중간을 충분히 채울 때요. --- 그러나 이것은 아마도 한 극단에서 다른 극단으로 옮겨가는 정신의 민첩한 움직임일 뿐이고 불붙은 불등걸처럼 단지 한 점 안에 있을 것이오.--- 그렇소. 하지만 이것이 정신의 넓이를 표시하지 않는다면 적어도 정신의 민활성을 표시하오.

235 - 온 땅위에, 심지어 우리가 죽은 후에 태어날 사람들에게까지 알려지고 싶어할 만큼 우리는 오만하다. 그런가 하면 주위의 대여섯 사람들에게 칭찬받는 것으로 기뻐하고 만족을 느낄 만큼 공허하다.

236 - 인간에게 그의 위대를 밝히지 않고 그가 얼마나 짐승과 동등한지를 보여주는 것은 위험하다. 인간에게 그의 저속을 밝히지 않고 그의 위대를 지나치게 보여주는 것도 위험하다. 그중 어느 것도 알려주지 않는 것은 더 위험하다. 그러나 둘을 다 보여주는 것은 매우 유익하다.

241 -  나는 이 본성도, 마치 습관이 제2의 본성인 것같이, 단지 제1의 습관에 불과한 것이 아닌지 몹시 두렵다.

254 - 전 인생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직업의 선택이다. 우연(偶然)이 그것을 좌우한다.

257 - 인간은 천사도 아니고 짐승도 아니다. 불행하게도 천사가 되려는 자가 짐승이 된다.

261 - 만약 우리가 밤마다 똑같은 꿈을 꾼다면 이 꿈은 우리가 날마다 보는 사물만큼이나 우리에게 작용할 것이다. 만약 어떤 직공이 매일 밤 열두 시간 동안 왕이 된 꿈을 꾸는 것이 확실하다면 그는 매일 밤 열두 시간 동안 직공이 된 꿈을 꾸는 왕만큼이나 행복하리라고 나는 생각한다.(중략) 인생이란 약간 덜 변덕스러운 꿈이니까.

266 - 진정 행복하기 위해서는 죽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있어야 한다.

269 - 나는 인간의 모든 불행은 단 한 가지 사실, 즉 그가 방안에 조용히 머물러 있을 줄 모른다는 사실에서 유래한다고 종종 말하곤 했다.(중략) 인생은 온통 이렇게 흘러간다. 사람들은 장애물과 싸우면서 안식을 찾는다. 그러나 이 장애물을 극복한 다음에는 안식이 낳는 권태로 인해 이 안식이 참을 수 없게 된다. 그래서 거기서 빠져나와 소란을 구걸해야 한다.(중략) 인간이 그 아무리 행복하더라도 만약 위락이 없고 또 권태가 번지는 것을 막아줄 어떤 열정이나 오락에 열중하지 않는다면 그는 이내 처량하고 불행해질 것이다.

304 - 부끄럽지 않은 것도 많은 사람들의 칭찬을 받으면 부끄러워지기 시작한다.

* 대속 2[代贖][명사]  1 남의 죄를 대신하여 당하거나 속죄함.2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음으로써 그 보혈(寶血)로 인류의 죄를 대신 씻어 구원한 일.3 종이 주인 대신 벌을 받던 일.

* 오직 보기만을 바라는 자들에게는 충분한 빛이 있고, 이와 반대되는 마음을 가진 자들에게는 충분한 어둠이 있다.

-> 사람들은 모두 자기가 보고자 하는 것만 본다. 믿고 싶은 것만 믿는다. 진실이 무엇이든 상관없다.

* 회심 2[回心][명사]  1 마음을 돌이켜 먹음.2 과거의 생활을 뉘우쳐 고치고 신앙에 눈을 뜸.3 나쁜 데 빠져 있다가 착하고 바른길로 돌아온 마음.

322 - 신앙이 없음을 괴로워하는 사람들을 보면 신이 그들에게 빛을 주지 않은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을 보면 그들을 눈멀게 하는 신이 있음을 알 수 있다.

332 - 추구하는 무신론자들을 동정할 것, 그들은 매우 불행하지 않은가 말이다. 신 없음을 자랑하는 자들을 통렬히 비난할 것.

->니체가 불쌍하다. 나 또한 동정받아야할 것이다.

336 - 세 부류의 사람들만이 있다. 신을 발견한 다음 신을 섬기는 사람들, 신을 발견하지 못하였기에 온 힘을 다하여 신을 찾는 사람들, 신을 찾지도 발견하지도 않은 채 살아가는 사람들, 첫째 사람들은 합리적이고 행복하고, 마지막 사람들은 불합리하고 불행하다. 중간 사람들은 불행하지만 합리적이다.

-> 파스칼은 아마도 두번째 부류일게다. 나는 세번째 부류일게고.. 그렇지만 한 부류를 더 추가해야 되지 않을까. 신을 발견하지도 않은 채로 섬기는 사람들 말이다. 믿음도 없이 교회에 습관적으로 다니거나(이런 사람은 차라리 더 낫다) 사회생활에 도움을 바라고 다니는 기회주의적인 사람들이 이에 속할게다. 지금의 개독들처럼 말이다.

340 - 영혼이 죽는지 영생하는지를 아는 것은 삶 전체에 중대한 문제이다.

->영혼의 존재 자체도 의심스럽다.

343 - 무한에 하나를 더해도 조금도 무한을 증가시키지 않는다. 무한한 길이에 한 자를 더해도 마찬가지다. 유한은 무한 앞에서 소멸되고 순전한 무가 된다. 우리의 이성도 신 앞에서 마찬가지이고 우리의 정의도 신의 정의 앞에서 그러하다.(중략) 우리는 신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신이 존재한다는 것은 충분히 알 수 있다.(중략) 신이 있다는 패를 택한 다음 득과 실을 저울질해 보자. 다움 두 경우를 생각해 보자. 만약 당신이 이긴다면 모든 것을 얻게 되고, 당신이 지는 경우에도 당신은 아무것도 잃지 않는다. 그러니 주저하지 말고 신이 있다에 걸어라.(중략) 힘은 이렇게 자신을 낮춤으로써 얻어진다.

-> 인간의 불행은 유한한 삶 속에서 무한한 삶을 꿈꾸는데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351 - 미신 ---- 그리고 정욕.

 마음의 거리낌 ---- 나쁜 욕망.

 나쁜 두려움.

 두려움, 신을 믿는 데서 오는 두려움이 아니라 신이 있는지 없는지를 의심하는 데서 오는 두려움. 좋은 두려움은 신앙에서 오고 --- 잘못된 두려움은 의심에서 온다. 좋은 두려움은 희망에 결부된다, 그것은 신앙에서 태어나고 또 사람은 자기가 믿는 신에 희망을 두기 때문이다. --- 나쁜 두려움은 절망에 결부된다. 사람은 믿지 않은 신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전자는 신을 잃을까 두려워하고, 후자는 그를 만날까 두려워한다.

377 - 이성은 주인보다 더 강압적으로 우리를 다스린다. 주인을 거역하면 불행해지지만 이성을 거역하면 바보가 되기 때문이다.

383 - 자신의 비참을 모르고 신을 아는 것은 오만을 낳는다. 신을 모르고 자신의 비참을 아는 것은 절망을 낳는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그 중간이다. 그 안에서 신과 우리의 비참을 동시에 만나기 때문이다.

385 - 무한 속에서는 어떤 것도 다른 것보다 더 탐낼 만한 것이 없으니

389 - 인간의 맹목과 비참을 보면서, 침묵하는 전 우주를 바라보고 또 아무 빛도 없이 홀로 내던져져 마치 우주 한구석에서 미아가 되기라도 한 듯 누가 그 자리에 자기를 두었는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죽어서는 무엇이 될지도 모를뿐더러 어떤 인식도 불가능한 인간을 바라보면서, 나는 잠든 사이에 황막하고 끔찍한 섬으로 실려가 눈을 떠보니 어디에 자기가 있는지도 모르고 또 거기서 빠져나올 방도도 없느 사람처럼 공포에 휩싸인다. 그리고 이다지도 비참한 상태에 대해 인간이 어떻게 절망에 빠지지 않는지 참으로 놀랍기만 하다. 나는 내 주위에 유사한 본성을 가진 다른 사람들을 본다. 나는 그들에게 나보다 더 많이 알고 있느냐고 물어본다. 그들은 아니라고 대답한다. 그리고 이 비참한 미아들은 주위를 둘러본 다음 무엇인가 즐거운 것을 발견하기라도 하면 그것에 매달리고 집착하였다. 나는 이런 것에 애착을 느낄수가 없었다. 그리고 눈에 보이는 것 외에 다른 것이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확연한가를 생각하며, 혹시 신이 자신의 표시를 남기지는 않았는지 찾았다.

390 - 인간의 불균형.   [자연적 지식이 우리를 인도하는 것은 바로 여기다. 만약 이 지식들이 진실되지 않다면 인간에게는 어떤 진실도 있을 수 없다. 만약 그것들이 진실되다면 인간은 어떤 방법으로든 자기를 낮추어야 할 커다란 겸손의 이유를 그 안에서 발견할 것이다.

 그리고 인간은 이것을 믿지 않고는 존재할 수 없으므로 자연을 한층 깊이 탐구하기에 앞서 한번 진지하게 그리고 마음껏 자연을 관찰하고 또 자기 자신도 바라보기 바란다. 그리고 거기에 어떤 균형이 있는지를 알고......]

 그리므로 인간은 전 자연을 그 높고 충일한 위용 가운데 관망하고 자기를 에워싼 낮은 사물들에서 눈을 먼 곳으로 돌리기 바란다. 우주를 밝히는 영원한 등불처럼 걸려 있는 저 찬란한 빛을 보라. 지구는 이 천체가 그리는 커다란 궤도에 비하면 한 점과 같은 것으로 나타남을 보라. 그리고 또 이 커다란 궤도 자체도 천공을 떠도는 뭇 천체들이 포용하는 궤도에 비하면 극히 미세한 한 끝자락에 불과한 것임을 보고 놀라기 바란다.

 그러나 우리의 시야가 거기서 멈추면 상상력이 이것을 넘어서게 하라. 자연이 제공하기보다 오히려 상상력이 받아들이기에 더 지칠 것이다. 눈에 보이는 모든 세계는 자연의 광대한 품 안에서 한갓 지각할 수도 없는 한 점일 뿐이다.어떤 상념도 이 광대한 자연에 가까이 다가가지 못한다.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공간 저편까지 그 아무리 우리의 관념을 부풀려본들 소용없다. 사물들의 실체에 비하면 우리가 낳는 것은 단순한 원자에 불과하다. 그것은 도처에 중심이 있고 원주(圓周)는 어디에도 없는 무한한 구체(球體)이다. 요컨대 우리의 상상력이 이 상념 속에서 갈피를 잡지 못한다는 것은 신의 전능하심을 감지하게 하는 가장 큰 표시이다.

 인간은 이제 자신으로 돌아와 존재하는 것에 비해 자기가 무엇인지를 생각하여 보라. 자연의 외떨어진 변경 한구석에서 길잃은 자기를 보고 이 비좁은 감방, 다시 말해 이 우주속에서 지구와 왕국들과 도시들과 자신을 각기 올바른 가치대로 평가하기를 배우라. 무한 속에서 인간이란 무엇인가.

 그러나 이에 못지않게 놀라운 또 하나의 경이(驚異)를 인간에게 보여주기 위해 그가 아는 한 가장 미세한 것을 찾아보게 하라. 한 곰팡이 벌레의 작은 몸 속에서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더 작은 부분들, 관절을 가진 다리, 다리 속의 혈관, 혈관 속의 혈액, 혈액 속의 체액, 체액 속의 방울, 방울 속의 체기(體氣)등을 그로 하여금 보게 하라. 이 최후의 것을 또다시 분할함으로써 인간이 이것들을 받아들이는 데 인간의 사고력을 소진시키며 마침내 그가 도달할 수 있게 된 최후의 대상이 지금 우리의 논의의 대상이라고 하자. 이것이야말로 자연의 최소의 것이라고 그는 생각할 것이다. 나는 그 안에서 새로운 심연을 그에게 보여주고 싶다. 그에게 눈에 보이는 우주뿐만 아니라 자연에 대해 상상할 수 있는 광대무변의 것을 이 축소된 원자의 울타리 안에 그려 보이고 싶다. 그는 그 안에서 무수한 우주, 보이는 세계와 동일한 비율로 각기 하늘과 유성과 지구를 가지고 있는 무수한 우주를 보기 바란다. 그리고 그 지상에서 뭇 짐승들을 보고 마침내 곰팡이 벌레를 보며 그 속에서 앞서 발견했던 모든 것을 재발견하기 바란다. 그리고 또 다른 것들 가운데서 끝도 휴식도 없이 동일한 것을 발견함으로써 그는 끝내 이 경이 속에서, 광대(廣大)함으로 인해 놀라웠던 전자의 경이에 못지않게 미소(微小)함으로 인해 놀라운 이 경이 속에서 정신을 잃고 말 것이다. 왜냐하면 우주 속에서, 실은 이것도 전체의 품안에서는 눈에 띄지도 않겠지만, 감지할 수도 없었던 우리의 육체가 이제는 도달할 수 없는 무(無)에 비하면 하나의 거인, 하나의 세계, 아니 하나의 전체임을 보고 그 누가 경탄하지 않겠는가.

 이렇게 자기를 관찰하는 사람은 자기에 대해 두려움을 느낄 것이다. 그리고 자연이 그에게 부여한 부피로 인해 무한과 허무 두 심연 사이에 걸려 있는 자신을 바라보며 이 경이 앞에서 전율할 것이다. 그의 호기심은 경탄으로 변함으로써, 그는 오만하게 이것을 탐구하기보다 오히려 침묵 속에서 관망하려는 마음으로 기울어질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왜냐하면  결국 인간이란 자연 속에서 무엇인가. 무한에 비하면 허무, 허무에 비하면 전체, 허무와 전체 사이에 걸려 있는 중간자이다. 양극(兩極)을 이해하는 데서 무한히 동떨어진 인간에게는 사물의 종극도 그 근원도 다 같이 헤아릴 수 없는 비밀 속에 숨겨져 있다. 인간은 그가 빠져나온 허무도, 그 안에 삼키어지는 무한도 다 같이 보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인간은 사물의 종극도 근원도 알지 못하는 영원한 절망 속에서 단지 사물들의 중간의 [어떤] 외양을 보는 것 외에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만물은 허무에서 나와 무한을 향해 나아간다. 그 누가 이 놀라운 움직임을 따라가겠는가. 이 경이의 창조자는 이것들을 안다. 다른 누구도 알 수 없다.

 이 두 무한을 바라보지 않은 탓으로 인간은 마치 자연과 어떤 균형을 유지하고 있기라도 한 듯 외람되게 자연의 탐구에 나섰다. 그들이 그 대상만큼이나 무한한 오만으로 사물의 근원을 이해하고 이것에서부터 만물을 아는 데까지 이르려 한것은 기묘한 일이다. 이러한 계획은 자연과 같이 무제한의 능력이나 오만이 없으면 정녕 꿈꿀 수도 없기 때문이다.

 사람은 교육을 받으면, 자연이 그 자신의 상(像)과 창조자의 상을 모든 사물에 아로새겼으므로 모든 것이 자연의 이중의 무한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학문이 탐구의 범위에 있어 무한하다는 것을 안다. 왜냐하면 가령, 기하학에는 제시해야 할 무한한 명제가 무한히 있다는 것을 그 누가 의심하겠는가. 이 명제들은 그것들의 원리의 수(數)와 복잡성에 있어서도 무한하다. 왜냐하면 최후의 것으로 제시하는 명제도 실은 그 자체로써 지탱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명제에 의지하고 있고, 또 이 명제는 다시 다른 명제를 기초로 삼고 있어서 결코 궁극의 것이 될 수 없음을 그 누가 모르겠는가. 그러나 물질계에서 그 성질상 무한히 분할 될 수 있는 것이라도 우리의 감각이 그 이상 아무것도 인지하지 못할 때 이것을 불가분의 점이라 부르는 것처럼, 우리는 이성에게 그렇게 보이는 것을 궁극의 것으로 정한다.

 지식의 이 두 무한 중에서 대(大)의 무한은 한결 쉽게 감지된다. 모든 것을 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드문 것은 이 때문이다. <나는 모든 것에 대해 이야기하겠다>고 데모크리토스는 말하였다.

 그러나 소(小)에 있어서의 무한은 훨씬 덜 눈에 보인다. 철학자들은 차라리 그것에 도달하겠노라고 장담하였지만 바로 여기서 모두 실패하였다. 이렇게 해서 <사물의 원리>, <철학의 원리>와 같은 흔해빠진 제목들 그리고 그와 비슷한 제목들이 생겨났다. 겉으로는 덜하지만 저 눈부신 [알고 있는 모든 것에 관하여]라는 제목에 못지않게 화려한 책들이다.

 사람들은 사물의 둘레를 포용하는 것보다 중심에 도달하는 것이 더 쉽다고 자연스럽게 생각한다. 눈에 보이는 세계의 넓이는 분명히 우리를 초월한다. 그러나 작은 사물들을 초월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기 때문에 우리는 더 용이하게 이것을 파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무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전체에 도달하는 것 못지않은 능력이 필요하다. 어느 경우에도 무한한 능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사물의 궁극의 원리를 깨달은 사람은 무한을 아는 떼까지 이를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하나는 또 하나에 의존하고 또 그것으로 인도한다. 이 양 극단은 서로 멀리 떨어진 나머지 맞닿고 결합되며 신 가운데, 오직 신 가운데 다시 만난다.

 그러니 우리의 한계를 알자. 우리는 그 무엇이되 전체는 아니다. 우리가 존재로써 소유하고 있는 것은 무(無)에서 태어나는 기본 원리들을 인식하지 못하게 한다. 또한 우리 존재의 왜소함은 우리에게 무한을 보지 못하게 한다.

 우리의 지능은 우리 육체가 자연의 공간 속에서 차지하는 것과 동일한 자리를 지적 사물의 세계에서 차지한다.

 우리는 모든 점에서 제한되어 있으므로 양극 사이에 중간을 유지하는 이 상태는 우리의 모든 능력 가운데 나타난다. 우리의 감각은 어떤 극단의 것도 느끼지 못한다. 지나친 소음은 귀멀게 하고 지나친 빛은 눈멀게 하며 지나치게 멀거나 지나치게 가까운 거리는 잘 보지 못하게 한다. 이야기가 지나치게 길거나 지나치게 짧으면 뜻이 흐려지고 지나친 진실은 우리를 놀라게 한다.(나는 영(零)에서 4를 빼면 영이 남는다는 것을 이해 못하는 사람들을 안다).  기본 원리들은 우리에게 지나치도록 자명하다. 지나친 쾌락은 괴로움이 되고 음악에서 지나친 화음은 불쾌감을 준다. 그리고 지나친 은혜는 화나게 한다. 우리는 빚진 것 이상으로 갚을 수 있는 것을 갖기 원한다. 우리는 극도의 뜨거움도 극도의 차가움도 감지하지 못한다. 극단적인 성질의 것들은 우리의 적이고 지각되지도 않는다. 우리는 그것들을 더 이상 느끼지 못하고 고통을 받는다. 너무 젊거나 너무 늙어도 이성이 방해받고 교육이 지나치거나 부족해도 마찬가지다. 결국 극단적인 사물들은 우리에게는 없는 것이나 다름없고 우리도 그것들에 대해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들이 우리에게서 빠져나가서나 우리가 그것들에게서 빠져나간다.

 이것이 우리의 진정한 상태다. 우리가 확실히 알 수도 없고 완전히 모를 수도 없는 것은 이것 때문이다. 우리는 항상 정처 없이 떠다니며 한끝에서 또 한끝으로 떠밀려 광막한 중간을 표류한다. 어느 끝엔가 우리를 비끄러매 고정시킬 수 있으리라 생각하면 그 끝은 흔들리며 우리를 떠나간다. 그래서 뒤쫓아 따라가면 잡히지 않고 우리에게서 빠져나가 영원히 도주한다. 어떤 것도 우리를 위해 멈추지 않는다. 이것이 우리 본래의, 그러나 우리의 성향과 가장 반대되는 상태이다. 우리는 어떤 견고한 기반, 최후의 변함없는 근거를 발견하고 그 위에 무한에까지 뻗어오를 탑을 세우기를 열망한다. 그러나 우리의 모든 기초는 무너지고 대지는 심연에 이르도록 입을 벌린다.

 그러니 확신과 견고함을 찾지 말자. 우리의 이성은 변화무쌍한 외관에 끊임없이 기만당하고, 아무것도 유한을 두 무한 사이에 고정시키지 못한다, 유한을 둘러삼키고 또 피하는 두 무한 사이에.

이것을 잘 깨닫기만 하면 사람들은 각자 자연이 정해 준 상태 안에서 조용히 머물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의 몫으로 주어진 이 중간이 언제나 양극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면, [누군가]가 사물에 대해 더 많은 지식을 가졌다고 해서 그게 무슨 대수겠는가. 그가 그런 지식을 가졌다면 좀더 높은 자리에서 내려다볼 것이다 그러나 종극(終極)에서는 여전히 한없이 멀지 않은가. 그리고 우리의 수명은 십년이 더 연장되더라도 영원 안에서는 똑같이 미미한 것이 아닌가.

 이 무한에서 보면 모든 유한은 동등하다. 무슨 이유로 인간이 자신의 상상력을 어떤 특정한 유한 위에 세우는지 나는 알 수가 없다. 우리를 유한과 비교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고통을 느낀다.

인간이 먼저 자신을 탐구하면 그는 그 이상 나아가는 것이 얼마나 불가능한지를 알게 될 것이다. 어떻게 부분이 전체를 알 수 있다는 것인가. -- 하지만 적어도 그가 균형을 이루고 있는 부분들만이라도 알고 싶어할 것이다. 그러나 이 세상의 부분들은 매우 긴밀하게 상호 관련되고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다른 부분들 혹은 전체를 모르고 한 부분을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가령, 인간은 그가 알고 있는 모든 것과 관련되어 있다. 그는 자기를 두기 위한 장소, 지속하기 위한 시간, 살기 위한 운동, 자신을 구성하기 위한 원소들, [자기를] 양육하기 위한 열과 음식, 숨 쉬기 위한 공기 등이 필요하다. 그는 빛을 보고 물체를 지각한다. 결국 모든 것은 그와 관련을 맺고 있다. 그러므로 인간을 알려면 어떻게 해서 그가 생존하기 위해 공기를 필요로 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리고 공기를 알려면 어떻게 공기가 인간의 생명과 이런 관계를 가지는지 등등.

 불은 공기 없이는 존속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하나를 알기 위해서는 다른 하나를 알아야 한다.

 이렇듯 모든 것은 결과이자 원인이고, 도움 받으면서 돕고, 간접적이고 직접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그리고 또 가장 멀고 가장 상이한 것들도 연결하는 자연적이고도 감지할 수 없는 연관으로 서로를 지탱하고 있으므로, 나는 전체를 모르면 부분을 알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부분을 개별적으로 알지 못하면 전체를 아는 것도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사물들의 그 자체로서의 혹은 신 안에서의 영원성은 우리의 짧은 인생을 다시 놀라게 할 것이다. 자연의 확고하고 변함없는 부동성도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계속적인 변화와 비교하면 우리에게 동일한 느낌을 줄 것이다.]

 사물을 인식하지 못하는 우리의 무능력에 결정타를 가하는 것은, 사물들은 단일한 것인데 우리는 종류가 다른 상반된 두 성질, 즉 정신과 육체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우리 안에서 울림을 내는 부분이 정신적인 것 외의 다른 것일 수 없기에 말이다. 그리고 우리를 단순히 육체적인 존재라고 주장한다면, 물질이 물질 자체를 인식한다고 말하는 것은 도저히 생각할 수 없으므로 이것은 우리가 사물을 인식하는 것을 더욱 더 어렵게 만들 것이다. 물질이 어떻게 자신을 인식하는지를 아는 것은 우리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다.

 이렇듯, 우리가 단순히 물질이라면 우리는 아무것도 알 수 없을 것이고, 정신과 물질로 구성되었다면 정신적인 것이든 물질적인 것이든 단일한 사물은 완전히 알 수 없을 것이다.

거의 모든 철학자들이 사물의 관념을 혼동하여 물질적인 것을 정신적으로, 또 정신적인 것을 물질적으로 말하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이다. 그들은 무모하게도 물질은 밑을 지향한다, 물질은 물질의 중심을 그리워한다, 물질은 파괴를 무서워한다, 물질은 진공을 두려워한다, 물질은 성질, 공감, 반감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성질들은 오직 정신에만 속한 것들이다. 그리고 정신에 대해서는 마치 어떤 장소에 있기라도 한 듯 생각하여, 한 자리에서 다른 자리로 움직이는 운동성을 부여한다. 이것은 오직 물질에만 있는 속성이다.

 우리는 순순한 사물들의 관념을 받아들이는 대신 우리가 지닌 성질로써 그것들을 채색하고 또 우리가 보는 모든 단일한 사물들에 우리의 복합적인 존재를 새겨 넣는다.

 우리가 모든 사물을 정신과 물질로 합성시키는 것을 볼 때, 이 혼합은 우리에게 매우 이해하기 쉬우리라고 그 누가 생각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다. 인간은 자기 자신에 대해 자연 중에서 가장 불가사의한 존재이다. 인간은 육체가 무엇인지, 더더구나 정신이 무엇인자 일 수 없으며, 하나의 육체가 어떻게 하나의 정신과 결합될 수 있는지는 그 무엇보다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야말로 난해한 문제의 극치이다. 그러나 바로 이것이 그의 고유한 존재이다.  <정신이 어떻게 육체에 결합되었는지 인간은 알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이 곧 인간이다. - 아우구스티누스 [신국론]>

 끝으로 우리의 결함에 대한 증명을 완전히 매듭짓기 위해 마지막으로 다음 두 가지 고찰로......

391 - 인간은 자연에서 가장 연약한 한 줄기 갈대일 뿐이다. 그러나 그는 생각하는 갈대이다. 그를 박살내기 위해 전 우주가 무장할 필요가 없다. 한번 뿜은 증기, 한 방울의 물이면 그를 죽이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우주가 그를 박살낸다 해도 인간은 그를 죽이는 것보다 더 고귀할 것이다. 인간은 자기가 죽는다는 것을, 그리고 우주가 자기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우주는 아무것도 모른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존엄성은 사유(思惟)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가 스스로를 높여야 하는 것은 여기서부터이지, 우리가 채울 수 없는 공간과 시간에서가 아니다. 그러니 올바르게 사유하도록 힘쓰자. 이것이 곧 도덕의 원리이다.

451 - 무신론자들의 반론 : <그러나 우리는 아루 빛도 없다.>

455 - 사람은 그 누구나 하나의 진리만을 따르면 따를수록 그만큼 더 위험한 잘못을 저지른다. 그들의 잘못은 어떤 허위를 따른 것이 아니라 또 하나의 다른 진리를 따르지 않은 데 있다.

471 - 무신론자들.   어떤 이유로 그들은 부활할 수 없다고 말하는가. 태어나는 것과 부활하는 것, 없었던 것이 생기는 것과 있던 것이 다시 있게 되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어려운가. 존재를 갖는 것이 존재로 되돌아오는 것보다 더 어려운가. 습관은 전자를 쉽게 만들고, 습관의 결여는 후자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통속적인 판단 방법이여!

 처녀는 왜 아이를 낳을 수 없다는 것인가, 암탉은 수탉 없이도 알을 낳지 않는가, 겉모양으로 이 알과 다른 알을 구별할 수 있는가, 그리고 암탉은 수탉처럼 (알의) 태점(胎點)을 만들 수 없다고 누가 우리에게 말하는가.

* 할례 [割禮][명사] [종교] 고대부터 많은 민족 사이에서 행하여져 온 의식의 하나로, 남자의 성기 끝 살가죽을 끊어 내는 풍습. 지금도 유대교도, 이슬람교도, 아프리카의 여러 종족들이 행하고 있다.

561 - 침몰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을 때 폭풍이 휘몰아치는 배 안에 있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교회를 괴롭히는 박해는 이런 종류의 것이다.

* 충일[充溢][명사] 가득 차서 넘침.

블레즈 파스칼(1623~1662)